도서/소설

비행운 : Day 4.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Chipmunks 2018.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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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아무 저항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순한 아이처럼 무기력하게 용대의 바짓가랑이에 토를 했다. 용대는 눈이 뒤집어져 "이게 정말?" 하고 한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아이처럼 꺼억꺼억 울기 시작했다. ... 자길 속인 여자. 이용한 여자. 끝까지 순진한 척하는 여자. 이 나쁜 여자를, 살리고 싶다, 생각하면서.


- 163P ~ 164P


그가 고른 첫번째 테이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 나왔다.

"런스 니 헌 까오씽(认识你很高兴)."

용대는 무심하게 따라 했다.

"런스 니 헌 까오씽."


이어, 명화가 한국말로 말했다.

"당신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용대도 그말을 따라 했다.

"당신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 165P~166P


  누군가에게는 천하의 나쁜 놈, 누군가에게는 피하고 싶은 사람, 누군가에게는 하나 뿐인 사람.

우리들은, '나'는 하나임에도 다양한 '나'로 다른 누군가의 기억속에 각인된다.

다양한 '나'들은 진정한 '나'가 아닌듯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나'이다.


청소년은 물론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부터 사회 초년생까지. '나'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나'에 대해 크게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늘 진짜 '나'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해명을 하려 한다. 그러나 수긍하는 이는 없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인식하는 '나'도 결국 '나'의 일부이며 '나'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나'가 누구인지 해명할 필요도, 스스로를 옭아맬 필요도 없다. 그것은 전부 '나'이며 '나'였다. 앞으로도 '나'일 것이다. '나'를 부정하는 다른 '나'들에게 '나'의 빛나는 존재를 똑똑히 보여주자.


--


  주인공 용대는 보잘 것 없는 '나'였다. 많은 사고와 불운을 거치고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는 신세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시간이 가면 더 나아지리라, 고 유일하게 그와 행복한 시간을 가졌던 죽은 아내의 중국어 테이프를 돌리며 생각한다.


자잘하지만 묵직한, 묵직하지만 그것쯤은 별거 아닌 인생의 희노애락을 보여주는 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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